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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apology

사과는 과거 자기 행위가 상대에게 해를 끼쳤음을 전제한 채 그에 대한 뉘우침을 표현하는 발화수반행위이며, 참·거짓이 아니라 적정조건의 충족 여부와 상대의 수용으로 성패가 갈린다.

성숙도 상록

용어와 역어

경쟁 역어: 사죄, 사과 화행

사과(謝過)와 사죄(謝罪)는 인정하는 것의 무게가 다르다 — 사죄는 잘못을 죄로 받는다. '유감 표명'은 사과의 완곡어가 아니라 다른 화행이다. 유감은 사태에 대한 감정을 말할 뿐 행위자를 자기로 지목하지 않는다.

관련 개념

  • 전제 화행론사과는 발화수반행위 다섯 분류 중 표현에 속하며, 적정조건과 불발·남용의 구분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 전제 적합 방향표현만 적합 방향이 없다. 사과가 명제내용의 참을 다투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 관련 제도적 사실공적 사과는 심리 상태 표현을 넘어 선언에 가까워진다. 책임을 인정한 기록이 제도 안에 남는다.
  • 관련 사회적 언약사과·용서 쌍은 방향 있는 의무의 해제 연산과 닿는다. 종결권이 채권자 쪽에 있다는 구조가 같다.
이 문서를 가리키는 글 3개
  • 관련 제도적 사실공적 사과는 표현에서 선언 쪽으로 옮겨가 책임을 인정한 기록을 제도 안에 남긴다.
  • 관련 사회적 언약위반 뒤의 사과와 해제는 언약 수명의 한 구간이다. 사과는 채무자가 보내고 해제는 채권자가 한다.
  • 관련 화행론표현 계열의 대표 사례다. 적정조건이 실무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사과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안하다”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는 말도 아니다. 그 말이 나오기 전과 나온 뒤의 관계가 다르다.

오스틴은 명시적 수행문의 목록에 사과를 넣는다. “사과합니다”는 사과를 보고하는 문장이 아니라 사과를 하는 문장이다. 화행론이 기술의 오류를 걷어낸 자리에서 사과는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표준 사례가 된다.

고프먼은 다른 계보에서 같은 것에 닿는다. 그는 사과를 마음의 고백이 아니라 교정 교환의 한 수순으로 본다. 누군가 규범을 어기면 공공 질서에 흠이 생기고, 그 흠을 메우는 정해진 절차가 돌아간다 — 교정 요구, 사과, 수용, 감사. 사과는 이 절차의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이동이다.

두 계보가 만나는 지점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사과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자리와 순서를 가진 행위다.

서얼은 발화수반행위를 단언·지시·언약·표현·선언 다섯으로 나눈다. 사과는 표현에 속한다. 적합 방향으로 보면 표현만 방향이 없다. 단언은 말을 세상에 맞추고, 지시와 언약은 세상을 말에 맞추고, 선언은 둘을 동시에 한다. 표현은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방향이 없다는 말이 사과의 문법 전체를 설명한다. 사과는 명제내용이 참임을 이미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래서 “정말 그랬느냐”를 다투는 순간 그 발화는 사과가 아니라 단언이 된다. 사과를 하면서 사실관계를 다투는 문장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가축도 따라 옮겨간다. 사과는 참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라 적정조건을 채웠는지로 갈린다. 서얼의 네 조건에 넣으면 이렇게 된다 — 명제내용은 과거의 내 행위 A, 예비조건은 A가 상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 성실성 조건은 내가 A를 뉘우친다는 것, 본질 조건은 그 발화가 뉘우침의 표현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의 두 종류가 갈린다. 예비조건이 어긋나면 불발이다. 하지도 않은 일을 사과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사람에게 사과하면 그 발화는 틀린 것이 아니라 성립하지 않는다. 성실성 조건이 비면 남용이다. 뉘우침 없이 형식만 갖춘 사과가 여기 들어간다. “사과문은 나왔는데 사과가 아니다”라는 일상의 판정은 거짓말 고발이 아니라 남용 진단이다.

타부치스는 하나를 더 붙인다. 사과는 화자 혼자 끝낼 수 없다. 사과는 발화와 수용이 짝을 이루는 담화이고, 종결 권한은 말한 쪽이 아니라 받은 쪽에 있다. “사과했잖아”가 종결 선언으로 먹히지 않는 이유가 이론 안에 이미 적혀 있다.

블룸쿨카와 올슈테인의 교차문화 연구가 사과의 표준 형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여러 언어의 사과 발화를 모아 다섯 전략으로 분해한다 — 사과 표지어, 책임 인정, 설명, 보상 제안, 재발 방지 약속. 사과 표지어만 필수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붙는다.

이 분해가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보상 제안과 재발 방지 약속은 표현이 아니라 언약이다. 세상을 말에 맞추겠다는 방향이 붙는다. 그래서 실제로 쓰이는 사과는 순수한 표현이 아니라 표현에 언약이 물린 혼합 화행이다. 사과가 자주 실패하는 자리도 정확히 여기다 — 표현만 하고 언약은 빼놓는 것.

캄프는 반대편에서 목록을 만든다. 그는 공적 인물의 비사과를 모아 책임을 깎아내는 기법들을 정리한다. 행위가 아니라 결과에 사과하기, 조건절을 붙여 피해의 성립 자체를 유보하기, 사과 대신 유감을 말하기, 남을 대신해 사과하기.

한국어에서는 문법이 이 작업을 더 쉽게 만든다. “물의를 빚어 송구스럽다”에는 물의를 빚은 사람이 없다. “오해가 있었다면”은 예비조건을 상대의 인지 문제로 옮긴다. 무주어와 이중피동으로 행위자를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사과의 외형뿐이다. 비사과를 가려내는 가장 빠른 검사는 문장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찾는 것이다.

성실성 조건은 바깥에서 확인할 수 없다. 뉘우침은 화자의 내부 상태이고, 관찰 가능한 것은 형식뿐이다. 진정성 논쟁이 결판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완고해서가 아니라 조건의 성격 때문이다.

제도는 이 난점을 형식으로 우회한다. 국가나 법인의 공식 사과는 심리 상태 표현에 머물지 않고 선언 쪽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발화함으로써 책임을 인정한 기록이 생기고, 그 기록 위에 배상과 시효와 후속 절차가 걸린다. 제도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자리가 여기다. 공적 사과의 문안을 두고 몇 달씩 다투는 것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문서를 다투는 일이다.

법이 개입하면 역설이 생긴다. 로벤놀트는 사과가 분쟁 해결 확률을 실제로 바꾼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였다. 책임을 인정하는 완전한 사과는 합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유감만 표하고 책임을 비켜간 부분적 사과는 아무 사과도 하지 않은 것보다 나을 게 없거나 오히려 나빴다. 그런데 미국 여러 주가 도입한 사과법은 사과를 과실 인정 증거로 쓰지 못하게 한다. 사과를 장려하려고 만든 이 장치가 사과에서 예비조건과 본질 조건을 덜어낸다. 책임을 지지 않기로 미리 못 박은 사과가 여전히 사과인지가 남는다.

형식화의 한계도 같은 곳에 있다. 사과·용서 쌍은 사회적 언약의 연산으로 깔끔하게 적힌다 — 위반이 생기고, 채무자가 사과를 보내고, 채권자가 해제하거나 하지 않는다. 프로토콜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형식이 담지 못하는 것이 성실성 조건이고, 사과에서 사람들이 진짜로 다투는 것은 언제나 그 조건이다. 사과가 제도 안에서 문서가 될수록 잘 작동하고, 관계 안에서 문서가 될수록 실패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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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John R. Searle (1969). 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John R. Searle (1976). A classification of illocutionary acts. Language in Society 5(1), 1-23
  4. Erving Goffman (1971). Relations in Public: Microstudies of the Public Order. Basic Books. 4장 교정 교환
  5. Nicholas Tavuchis (1991). Mea Culpa: A Sociology of Apology and Reconcili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6. Shoshana Blum-Kulka, Elite Olshtain (1984). Requests and Apologies: A Cross-Cultural Study of Speech Act Realization Patterns (CCSARP). Applied Linguistics 5(3), 196-213
  7. Zohar Kampf (2009). Public (non-)apologies: The discourse of minimizing responsibility. Journal of Pragmatics 41(11), 2257-2270
  8. Jennifer K. Robbennolt (2003). Apologies and Legal Settlement: An Empirical Examination. Michigan Law Review 102(3), 460-516